라오스의 역사
라오스의 다수 종족인 라오족은 운남 지역에서 발전한 난짜오(Nanchao)왕국이 몽고에 의해서 멸망하자 현재의 라오스 지역으로 이동해 왔다. 라오족이 문자를 가지게 된 시기가 크메르족과 관계를 맺은 이후였기 때문에 건국신화나 기타 고대사에 대한 내용은 구전되어 왔다.
14세기 초까지 라오족은 통일된 왕조를 이루지 못하고 여러 개의 므엉(Muong: 도시)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 중 루엉 파방을 중심으로 화 훔이 란쌍(Lan Xang: 백만 마리 코끼리)왕국을 건국하였다. 란쌍 왕국은 18세기 초 왕위 계승 문제로 왕실간의 다툼이 발생하였고 결국 위양짠, 루엉 파방, 참빠싹으로 분열되었다.
프랑스의 식민통치가 시작되면서 오늘날의 라오스 국경이 정해졌다. 프랑스는 중국으로 진출하기 위해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라오스를 병합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루엉 파방의 왕을 라오스의 국왕으로 승격시키고, 참빠싹과 씨엥쾅(Xieng Quang)의 왕을 주지사급으로 강등시켰다. 라오스가 내륙국이며 인구가 희박하여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고, 애초 프랑스가 의도한 중국 진출 교두보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자 식민정부는 라오스 개발을 등한시 했다.
일시적으로 라오스를 점령하였던 일본이 패망하자 지하에서 활동하던 라오스인들의 독립 움직임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루엉 파방 왕국의 펫싸랏(Phetsarat)은 1945년 9월 15일 라오 이싸라(Lao Issara: 자유 라오스)를 결성하고, 같은 해 10월 12일 라오스임시인민정부를 수립하고 장점헌법을 채택하였다. 일본의 패망으로 프랑스는 라오스의 재식민통치를 위한 일환으로 잔존 일본군을 무장해제 시키고, 중국 국민당(KMT) 세력을 철수시키면서 라오 이싸라 운동을 방해하였다. 결국 프랑스군이 위양짠까지 진격하자 라오 이싸라 정부는 방콕으로 망명하였고, 프랑스는 위양짠과 루엉 파방을 점령하여 라오스의 재식민지화에 성공하였다.
한편 태국으로 망명한 라오 이싸라 정부는 국제사회에서 라오스의 독립을 인정받지 못하자, 임시 정부를 이끌고 있던 쑤파누웡(Souphanouvong: 붉은 왕자)이 친프랑스 인물인 쑤완나품(Souvannaphoum)과 결별하고 베트남의 베트민(Viet Minh)과 연대를 모색하였다. 1954년 프랑스가 디엔 비엔 푸(Dien Bien Phu) 전쟁에서 베트남에게 패하자 라오스의 독립도 자연스럽게 거론되기 시작했다. 1953년 10월, 라오스는 입헌군주제의 왕립라오정부(Loyal Lao Government)를 탄생시키며 완전한 주권국가의 지위를 확보하였다.
독립이 달성된 후 22년간 라오스 국내 정치는 국제정치의 냉전적 구도의 전유물이 되었다. 베트남, 중국, 소련은 라오스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고착화시키기 위해 국내 공산주의 세력인 라오인민혁명당(LPRP)과 파텟라오(Pathet Lao: 라오인의 땅)를 지원한 반면, 미국과 태국은 왕립라오정부를 비공산주의 국가로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공산화시키기 위해 지원한 군수품 보급로가 라오스 동부를 경유하게 되자 미군은 이 지역을 무차별적으로 폭격하였다.
1973년 2월 라오스 내전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이미 전 국토의 2/3을 장악하고 있던 파텟 라오는 미군의 지원을 받은 우익 지도부의 부패를 목격한 대중들의 압도적 지지와 호치민(湖志明)의 북베트남군이 남베트남을 통일 시킬 것이라는 유리한 판세 속에 위양짠 정부를 총 공격하여 1975년 8월 마침내 중앙 정부를 장악하였다. 혁명군은 즉시 혁명행정위원회를 구성하고, 입헌군주제를 폐기하는 한편 까이썬(Kaysone Phomvihane)을 중심으로 공산정권을 수립하였다.
1991년 성문화된 헌법이 채택되었다. 이 헌법에 의하면 “모든 권력은 국민에 의한 그리고 국민에 의해서 나온다.”(제2조)고 명시되어 있으나 중국과 베트남의 경우처럼 LPRP이 정치권력을 완전히 독점하고 있는 폐쇄적 다원주의이다. 법적으로도 LPRP을 제외한 어떤 정당도 인정 되지 않을뿐더러 조직될 수 없다. 라오스는 1997년 미얀마와 함께 아세안에 가입하여 조심스럽게 국제사회로 나서고 있다.
라오스(LAOS), 삶이 조금 불편할 뿐 행복지수는 최고인 나라.
동남아시아의 오지 라오스. 라오스는 시대가 한참 바뀌었는데도 아직 공산주의 국가이다. 그렇지만 국가의 구속과 핍박이 거의 없는 자유스러운 공산주의 국가이다.
오랫동안 은둔의 나라로 세상의 발전을 따라가지 못한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대체적으로 국민들의 삶의 수준이 낮다.
그런데 삶의 수준이 낮다고 꼭 행복 지수도 낮은 건 아닌가보다. 지질이도 못 사는 시골 사람들의 눈을 보면 대부분 맑고 얼굴엔 미소가 가득 차 있다. 코 흘리개 아이들은 조금도 때묻지 않은 천진난만한 순박함과 행복이 넘친다. 어쩌면 그들은 아직 돈이 주는 편안함을 알지 못하고 사는 천진난만한 사람들일 뿐이다.
라오스는 모든 것이 풍부해서 사람들이 순박하다. 강에 가면 '물반 고기반' 이라는 말처럼 생선이 풍부하고, 땅에는 과일나무가 무성하고, 날씨는 따뜻하고 의식주에 걱정이 없으니 선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모든것이 풍부하니까 누가 찾아 오면 그냥 가져가라고 선심 쓰고, 신경을 안쓴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베트남전쟁 때 미국으로부터 그 많은 폭탄을 맞고 엄청난 피해와 치유되기 어려운 상처를 입었음에도 아직 아무런 불평도 비난도 하지 않고 묵묵히 현실에 만족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시간이 멈춘 나라 라오스.
자연과 함께 힐링하고 재미있는 체험을 한번에 할 수 있는 투어!
라오스 여행의 시작과 끝.
비엔티안(VIENTIANE).
세계에서 가장 조용한 수도 비엔티안은 라오스의 허리를 담당한다. 공항에서 내려 다른 도시로 이동할 때까지,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일정 시간을 보내야 하는 비엔티안은 라오스를 알아가기 좋은 곳이다.
비엔티안은 라오스의 수도이자 라오스에서 가장 큰 도시로 메콩강에 위치한다. 불교 국가 라오스의 수도답게 비엔티안에는 사원이 많다. 예전에는 사원이 무려 80개나 있었다고 알려졌으나, 1827년 타이족에 점령돼 파괴되어 현재는 20여 개만 남아 있다.
라오스는 연중 내내 온난한 기후를 유지해 여행하기 좋은 도시입니다. 특히 라오스의 여행 최적기인 12월~1월 사이에 라오스를 방문하면 비가 거의 내리지 않으면서 기온이 15℃ 안팎으로 선선해 여행하기에 가장 좋다고 합니다.
인천에서 라오스까지 비행시간은 5시간 15분이 소요됩니다. 시차는 2시간으로 우리나라보다 2시간 빠른 시간으로 계산하면 됩니다.
◆ 마음까지 평온해지는 라오스 사원 ◆
불교의 나라 라오스에서 많은 사원들 방문하기
라오스의 상징인 탓 루앙 (위대한 불탑 Great Stupa를 뜻함)은 빠뚜싸이(독립기념탑) 동북쪽으로 약 1.5km 미터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타지역의 라오인들조차 이곳에서 공양을 드리는 것이 소원일 정도로 라오스에서 가장 신성시 여기는 불교 유적이며 라오스의 주권을 상징하기도 한다. 황금색 부처의 사리탑이 이 사원의 핵심이다.
11월 보름, 대규모의 축제가 열리는 곳이자 지폐에 사용될 정도로 라오스에서 신성하게 여겨지는 탓 루앙(That Luang)은 부처의 사리가 보존된 황금 탑이다. 라오스 사람들의 소원은 평생 한 번이라도 축제 때 탑돌이에 참여하는 것이라니, 라오스를 이야기할 때 탓 루앙을 빼놓을 수 없다. 탓 루앙을 짓고 수도를 비엔티안으로 옮긴 세타티랏 왕은 살아 있을 때 많은 업적을 이룬 덕에 황금 탑 앞에 편히 앉아 사람들로부터 꽃과 과일을 받았다.
탓 루앙에서 라오스의 종교와 문화를 느꼈다면 라오스의 진짜 자존심은 ‘서 있는 활주로’ 빠뚜싸이(Patuxai)에서 마주할 수 있다. 미국 정부가 공항을 건설하라고 지원한 시멘트를 빼돌려 만든 빠뚜싸이는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기념하고 2차 세계대전과 프랑스 독립전쟁으로 사망한 사람들을 추모하는 라오스의 독립문이다. 외형은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과 비슷하지만 내부 양식은 라오스 풍으로 만들어졌다. 빠뚜싸이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도로가 뻗어 있으며, 그 앞으로 작은 정원과 분수가 있습니다. 지금은 여행자들이 느긋하게 비엔티안을 만끽하는 곳이다.
왓 시사켓은 많은 사원을 둘러보았다 하더라도 꼭 가봐야 할 사원으로 꼽힌다. 1819~1824년 지어진 왓 시사켓은 비엔티안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이다. 사원 일부가 프랑스 식민지 시절 훼손되었으나 본당은 그 모습을 그대로 지키고 있다.
왓 시사켓은 본당을 중심으로 네모 모양 회랑이 둘러싸고 있다. 회랑 벽에는 규칙적으로 작은 구멍이 나있는데 그 안에 작은 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그 앞으로는 금빛 옷을 두른 불상들이 질서정연하게 앉아 왓시사켓을 지키고 있다. 사원 안에 들어서면 양옆과 벽으로 막힌 공간에 금빛 옷을 두른 큰 불상이 여행객을 평온한 표정으로 맞이한다. 고개를 들어 사원 천장을 바라보면 나무와 벽돌로 섬세하게 올린 지붕이 감탄을 자아낸다.
시사케트(Sisaket)사원은 비엔티안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으로 1818년에 아노봉왕(Anouvong) 에 의해 건축되었다. 19세기 초에는 매우 중요한 사원이었는데, 1829년 비엔티안을 불태운 대화재로 단지 하나의 탑만 남게 되었다. 몇개의 불상과 큰 불상을 포함한 공예품 두개의 청동불상과 19세기 초의 공예가 잘 나타나 있는 120개의 석회석으로 만든 불상만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1565년 왕도를 루앙프라방에서 비엔티엔으로 천도 할 때, 옛 란상왕국의 상징이였던 에메랄드 불상을 모시기 위해 건축되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779년 태국의 샴 왕국과의 전쟁에서 건물은 소실 되었고 에메랄드 불상은 약탈당해 현재까지도 방콕의 왕궁사원에 모셔져 있습니다.
순수하고 소박한 라오스 사람들을 마주하려 왓 씨므앙(Wat Si Muang)으로 갔다. 마침 한 가족이 새로 산 오토바이와 자신들을 실로 연결하고 승려로부터 축복을 받고 있었다. 오토바이를 가져온 이들, 서로의 팔에 실을 묶어 주는 이들의 표정에도 맑은 행복이 어려 있다. 비엔티안의 어머니 사원인 왓 씨므앙에서 소원을 빌면 잘 이루어진다고. 단, 무언가 약속을 걸고 그것을 지켰을 경우에만 해당된다. 어떤 간절한 소원도 노력과 포기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걸까. 무엇을 걸고 무엇을 이루어야 하나, 삶을 채운 것들을 하나씩 저울 위에 올려 본다.
비엔티안에는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명소가 있다. 바로 씨앙콴으로 불리는 불상 공원이다. 불상 공원 내에는 불교와 힌두교가 결합된 갖가지 불상이 조각되어 있다. 푸른 잔디 밭 위에 크고 작은 불상이 저마다의 표정을 지으며 관광객의 눈을 사로잡는다.
라오스는 바다가 없는 내륙인데도 불구하고 라오스 전 지역에 소금을 공급하는 소금마을이 있었어요!
라오스 현지식을 배를 타고 먹으면서 강변을 구경했어요. 다행이 점심은 그런대로 괜찮았어요.
◆ 아름다운 쏭강이 흐르는 방비엥 ◆
비엔티안에서 100㎞가량 떨어진 방비엥(Vang Vieng)은 배낭여행객들의 천국이다. 쏭강이 흐르는 고즈넉한 분위기와 그곳을 닮은 라오스 사람들의 친절한 미소는 낯선 나라에서 느끼는 긴장감을 단번에 풀어준다. 또 방비엥은 석회암 절벽에 둘러싸인 강가에서 카약과 동굴 탐험을 즐길 수 있다. 튜브를 타고 천천히 강물을 따라 동굴을 구경하다 보면 머릿속 복잡한 생각이 스르륵 강물에 떠내려간다.
쏭강 지류에 있는 탐낭 동굴은 수심이 깊지 않아 튜빙을 즐기기에 좋다. 유유자적 라오스의 하늘을 즐기며 안으로 들어가면 기이하고 신비한 모양의 종유석이 눈을 즐겁게 한다.
블루 라군에서 다이빙을 시도하는 여행객들
블루 라군은 수심 5m의 계곡으로 영화 '블루 라군'의 촬영지로도 유명합니다. 특히 물이 너무 깨끗해서 좋았어요.
방비엥에서의 다양한 엑티비티들(Activities)
방비엥 정글 짚라인, 타는 거리가 제법 길어서 재미가 쏠쏠했어요.
카약 하나에 여러명이 타서 같이 웃고 즐기니깐 시간가는 줄 몰랐네요.
액티비티함의 끝 ! 라오스 방비엥 '버키카 투어', 더운 날씨에 타니까 재미도 있고 제법 시원했어요.